성·재생산 건강과 권리에 대한 국제적 정책 추세와 한국에 주는 함의

Global Policy to Ensure Sexual and Reproductive Health and Rights and its Implication to South Korea

초록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는 임신·출산·양육과 돌봄을 담당하는 여성의 몸에 대한 인구통제정책 비판을 통해 발견된다. 1995년 베이징 세계여성대회 이후 주류화된 인권 규범이다. 유럽연합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 성·재생산 건강에 대한 국가 전략과 정책이 수립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바이든 정부 집권 이후 국제금지규정이 철폐되고 인구주택총조사에 성적 지향과 젠더 정체성 문항이 포함되는 등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에 대해 보다 진보적인 정책이 추진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제4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에서 최초로 성·재생산권 보장이 공식 정책 목표로 포함되었지만, 이를 추진하기 위한 기반은 부족한 상태다. 국가 중심의 인구통제와 재생산하는 몸을 도구화한다는 비판과 불신을 벗어나 사람 중심적 대응을 위해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라는 규범적·실용적 관점을 채택한 정책을 설계해 나가야 한다.

1. 들어가며

지난 6월 파리에서 베이징 세계여성대회 25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였던 ‘평등의 세대 포럼(Generation Equality Forum)’이 열렸다.1) 국제 수준에서 각국 정부와 시민사회, 국제단체, 민간 영역이 참여한 평등의 세대 포럼에서 성평등 행동강령을 도출하기 위해 설정한 여섯 가지 핵심 영역에는 젠더 기반 폭력, 경제적 정의와 권리, 자기결정권 및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 기후 정의를 위한 페미니스트 액션, 젠더 평등을 위한 기술과 혁신, 페미니스트 사회운동과 리더십이 포함되었다. 2026년까지 성평등을 가속화하고 여성과 소녀들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총 400억 달러의 예산을 투자하기로 결의한 이 포럼에서 국제사회를 대표하는 참여자들은 지난 26년 동안 성평등이 그저 구호로 남아 있었던 상황을 바꾸기 위해 책임 주체들의 실질적 행동이 필요하다고 촉구했다(Generation Equality Forum, 2021).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에 대한 행동강령에는 네 가지 전략이 제시되었다. 첫째, 2026년까지 모든 아동과 청소년, 청년들에게 포괄적 성교육(comprehensive sexuality education)을 제공한다. 둘째, 보편적 건강 보장(Universal Health Coverage)의 핵심 요소로 성·재생산 건강을 보장하기 위한 서비스를 포함해야 한다. 셋째, 자신의 몸과 섹슈얼리티, 재생산에 대한 자율적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여성들의 권력을 강화(empower)하고 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한 법과 제도를 정비한다. 넷째,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를 옹호하는 조직, 네트워크, 운동을 지지함으로써 관련한 정책 결정 과정에서 여성의 권리를 대변하는 이들의 참여와 책무를 강화하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파리의 국제적 성평등 촉진을 위한 행동강령은 이 모든 전략에서 성적 지향과 젠더 정체성, 계급과 인종 등 다층적 정체성, 축약하여 다양성(in all their diversity)에 대한 고려를 빼놓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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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2021년 평등의 세대 포럼이 제시한 성평등 가속화 6대 행동강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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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Generation Equality Forum. (2021). Action Coalitions: Global Acceleration Plan. Paris: UN Women. https://forum.generationequality.org/sites/default/files/2021-06/UNW - GAP Report – EN.pdf에서 2021. 8. 29. 인출.

한국에서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SRHR: Sexual and Reproductive Health and Rights)는 이제야 주류 정책 공간에 진입하는 모양새다. 제한적으로 인정되는 사유가 있는 상황을 제외한 대부분의 임신중지를 불법으로 규정하던 형법에 관한 헌법불합치 판결이 있었던 2019년을 전후로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에 대한 논의가 확장됐고, 2020년 12월 정부가 발표한 제4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에 20가지 추진 전략 중 하나로 ‘생애 전반 성·재생산권 보장’이 포함되었다.2) 그러나 이를 보장하기 위한 제도와 정책은 아직이다. 2019년 헌법재판소가 형법의 낙태죄가 여성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판결하고 모자보건법과 형법을 2020년까지 개정하라고 판결했으나 시한을 훌쩍 넘긴 지금도 법률 개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법적 근거의 결정을 기다리며 보건복지부 역시 필수의료서비스로 임신중지를 보장하기 위한 정책을 제시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고소득 국가에서 건강보험급여로 제공되는 피임은 온전히 여성의 부담으로 남아 있다. 국제적으로 보편 인권의 구성 요소로 인정받는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가 한국에서 처해 있는 상황을 보여 주는 실례라고 볼 수 있다.

이에 이 글에서는 국제 규범으로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가 정치적·정책적으로 논의되는 상황을 개략적으로 살펴보고 안전한 임신중지 서비스의 보편적 보장을 비롯해 여러 과제에 당면하고 있는 한국에서의 함의를 제시하고자 한다. 성·재생산 건강 영역 내에서 임신중지와 관련한 당면 과제를 다루는 기획의 초점에 맞추어 논의하되 개별 국가의 정책보다는 국제적 성·재생산 건강 정책의 방향을 다룬다. 국제적 건강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국가가 주로 국제개발원조에 기여하는 몫이 큰 공여국이라는 점에서 서구 국가들의 상황을 중심으로 논의하는 것은 본고의 한계이지만, 동시에 국제적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 논의의 형편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2. 국제적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 보장 정책의 현황

가.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가 보편 인권이 되기까지

국제적으로 여성의 생식과 재생산을 다루는 정책은 가난한 여성들의 높은 출산율을 통제하고자 하는 인구통제정책(population control policy)의 하나로 시작되었다. 기하급수적 인구 성장이 지구의 식량 생산 속도를 압도하고, 인류의 빈곤을 지속시킬 것이라는 맬서스의 인구론은 계급, 국가, 인종과 교차하는 우생학적 관념과 결합해 국제 개발과 원조 영역에서 직간접적 영향력을 발휘했다. 같은 시기 경제개발계획의 주요 정책으로 가족계획을 도입한 한국에서도 정책의 목표는 출산율 감소를 위한 몸에 대한 통제로, 임신과 출산을 담당하는 여성의 건강과 권리는 목표를 비켜나 있었다(Kumar, Birn, & McDonough, 2016).

빈곤층과 제3세계 여성의 재생산 통제를 목표로 했던 산아제한정책은 원치 않는 임신을 반복해 경험하며 생명의 위협을 받는 여성들의 상황을 개선하는 데에 기여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가족계획정책은 국가의 목표를 위해 여성의 몸을 도구화하고 한창 개발 중이던 피임 기술을 저소득 국가에서 보급·시험하며 여성들의 건강과 자율성을 침해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에 페미니스트들은 인구통제나 일상과 괴리된 개발이 아니라 여성의 건강과 권력 강화(empowerment)를 목표로 하는 인구정책을 요구하게 되었다.

1974년 열린 제3차 세계인구총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일방적으로 불임 시술을 강요당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낳을 아이의 수와 터울을 자유롭고 책임 있게 결정하고, 정보와 교육, 자원을 가질 권리를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재생산권(reproductive right) 개념이 제시되었다. 사회가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가부장적 통제로부터 벗어나 성적 권리와 신체 자율성(bodily autonomy)을 보장하기 위해 억압적인 관습과 법·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인식 역시 확대되었다(Freedman & Issacs, 1993). 이러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된 결과 1994년 카이로 국제인구개발회의와 1995년 베이징 세계여성대회에서는 임신과 출산이 여성의 건강과 권력 강화 측면에서 논의되어야 마땅하다는 국제사회의 합의를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라는 개념을 통해 공식화하게 된다(하정옥, 2013).

이후 약 25년이 흐르는 동안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는 국제적으로 피임과 인구통제, 임신과 출산 등 재생산하는 몸을 둘러싸고 이루어진 정치적 투쟁의 결과 성취한 역사의 산물로 보편 인권 규범으로 주류화되었다. 유엔 지속가능개발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al)의 17개 목표 중 세 번째 목표인 보편적 건강 보장 달성, 네 번째 목표인 모두를 위한 양질의 교육, 그리고 다섯 번째 목표인 성평등 달성이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를 인용한다. 보건의료와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조건들에 대한 개선을 이야기하는 세 번째 목표의 일곱 번째 세부 목표3)는 ‘2030년까지 가족계획, 정보, 교육을 포함하는 성·재생산 건강 서비스에 대한 보편적 접근성을 보장하고 재생산 건강을 국가 전략과 사업에 포함’하는 것이다.

물론 이를 둘러싼 정치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2019년 뉴욕에서 열린 보편적 건강 보장 선언을 위한 고위급 회담에서 네덜란드 대표로 참석한 외교통상개발부 장관은 58개국4)의 성·재생산 건강 서비스 보장이야말로 보편적 건강 보장의 주춧돌이라고 강조했다(Government of the Netherlands, 2019). 이는 지속가능개발목표를 비롯한 유엔 문서 안에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 개념을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며 ‘가족의 보호를 감사히 여기며 젊은이들에게 해로운 성적 위험을 용납하지 않는 성교육만을 지지하고, 피임의 수단으로 임신중지에 반대’한 사우디아라비아, 러시아, 미국 등 19개 신우파 정권이 통치하는 국가들의 발언에 대한 대응이기도 했다.

나. 미국의 성·재생산 정치와 정책

성·재생산 건강은 미국에서 대단히 정치화되어 있는 주제이다. 이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정책이 국제금지규정(Global Gag Rule)이다. 이 정책은 임신중지 서비스뿐만 아니라 임신중지와 관련한 정보를 제공하는 모든 국제원조사업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도록 하는 방침이다. 1984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세계인구총회에서 이를 주장해 멕시코시티 정책(Mexico City policy)이라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트럼프 집권 시기 미국은 미국 내에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활용해 임신중지 서비스 보장에 반대했다. 이런 기조는 국제 정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집권한 2017년 미국은 국제금지규정을 부활시켰고, 바이든 대통령은 2021년 집권 즉시 이를 철회했다.

미국에서 집권 여당이 바뀔 때마다 국제금지규정 도입과 취소를 반복하는 정치적 상황은 전 세계 여성들의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 [그림 2]에서 확인할 수 있듯 미국은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 영역에서 가장 많은 원조 기금을 제공한다. 오바마 정부가 부시 행정부의 국제안보계획에서 증액한 HIV·AIDS를 비롯한 성매개 감염 통제와 가족계획 및 재생산 건강 프로젝트에 대한 원조 예산을 유지하는 가운데 성·재생산 건강을 지원했다면, 트럼프 정부는 이 영역에 대한 예산 투자를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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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 영역에 대한 총국제개발원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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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Jaeger, K. & Johnson, Z. (2021). Generation Equality? Trends from a decade of donor funding for SRHR. https://donortracker.org/insights/generation-equality-trends-decade-donor-funding-srhr에서 2021. 8. 29. 인출.

국제여성건강연합(International Women’s Health Coalition)에 의하면 2017년 시작된 국제금지규정의 예산 삭감은 임신중지에 선택적으로 적용되지 않았다. 저소득 국가의 지역사회에서 주민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보건서비스를 제공하던 시민사회에 대한 지원 중단은 이들이 기존에 제공하던 다른 서비스(영양, 젠더 기반 폭력, 모자보건 등)에도 영향을 미쳤다(Lieberman, 2019). 지역사회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하는 풀뿌리 여성 조직에 대한 지원 약화는 국가 보건의료 체계가 허약한 지역에서 일선 보건서비스 공급이 어려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코로나19 유행은 더 가난하고 소외된 지역에서 필수 서비스를 제공하던 조직의 기반을 약하게 만드는 조치가 얼마나 장기적인 해악을 미칠 수 있는지를 확인시켜 주었다. 이에 미국 의회와 시민사회는 국제금지규정을 폐지하는 법안(Global Health, Empowerment and Rights Act)을 제정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Dhatt, Varanka, & Williams, 2021).

바이든 정부는 국제금지규정 철폐와 함께 트럼프 정부가 중단한 유엔인구기구에 대한 예산 지원을 재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단되었던 성·재생산 영역의 과제들에 다시 착수했다. 이 중 대표적인 것이 정부가 수행하는 조사와 정보생산 체계 내에 성적 지향과 젠더 정체성(SOGI: Sexual Orientation and Gender Identity)에 대한 항목을 포함하도록 하는 조치다. 국가 정책 결정의 기본 근거가 되는 자료 생산에서 성적 지향과 젠더 정체성을 묻는 것은 성 소수자 집단이 삶의 어떤 영역에서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고, 어떤 사회정책이 필요한지를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 바이든 정부는 기존 국가 조사에서 SOGI와 관련한 문항을 삭제할 것을 요구했던 트럼프 정부와 반대로 2021년부터 인구주택총조사(US Household Pulse Survey)에 SOGI를 포함하기로 했다. 미국 통계청에 의하면 기존에 성별을 남성과 여성으로 묻던 질문을 <표 1>과 같이 변경한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United State Census Bureau,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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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
2021년 미국 인구주택총조사가 포함하는 성적 지향과 젠더 정체성 문항
질문 응답
태어날 때 발급받은 본디 출생증명서에 지정된 성별은 무엇입니까?
What sex were you assigned at birth on your original birth certificate?
1. 남성
2. 여성
지금 당신은 스스로의 성별을 무엇이라고 규정하십니까?
Do you currently describe yourself as male, female or transgender?
1. 남성
2. 여성
3. 트랜스젠더
4. 그 외
다음 제시된 항목 중 당신을 가장 잘 표현한다고 생각하시는 항목은 무엇입니까?
Which of the following best represents how you think of yourself?
1. 게이 또는 레즈비언
2. 게이나 레즈비언이 아닌 이성애자(straight)
3. 바이섹슈얼
4. 그 외
5. 모르겠음

자료: United State Census Bureau. (2021). Phase 3.2 of Census Bureau Survey Questions Now Include SOGI, Child Tax Credit, COVID Vaccination of Children. https://www.census.gov/library/stories/2021/08/household-pulse-survey-updates-sex-question-now-asks-sexual-orientation-and-gender-identity.html에서 2021. 8. 29. 인출.

다. 유럽의 성·재생산 건강 정책

유럽에서도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 보장이라는 개념 틀을 중심으로 이를 위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이후부터다. 2013년 코펜하겐에서 유럽 피임과 재생산건강위원회(European Society of Contraception and Reproductive Health)가 개최한 피임, 재생산과 성 건강에 대한 첫 번째 유럽 국제회의가 열렸다. 여기에 참여한 유럽 정부들은 유럽 전역에서 현대적 피임법을 이용하는 여성의 비율을 50%까지 높이고, 저소득 국가에서 이 비율을 20%까지 올리기 위해 노력할 것을 결의했다(WHO Europe, 2013).

코펜하겐 회의 이후 유럽 의회는 성·재생산 건강에 대한 다양한 조사와 연구를 진행하며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여성의 건강을 중심에 두고 정책을 추진해 나가야 한다는 합의를 유지해 왔다. 코로나19의 세계적 유행으로 인해 젠더 기반 폭력의 위험이 커지고 피임 등 성·재생산 건강서비스 접근성이 떨어지는 상황에 대처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최근 유럽연합 의회는 ‘여성 건강 관점에서 유럽에서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의 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여기에서 파악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촉구했다. 2021년 5월 브리핑에서 유럽연합 의회는 모든 회원국이 공식적으로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를 보장하고, 성·재생산 건강 서비스 접근을 저해하는 모든 장벽을 제거하며, 코로나19 팬데믹이 여성 건강과 권리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촉구했다(European Parliament, 2021).

진척 상황은 국가마다 다르지만, 유럽 국가들에서 성·재생산 건강 영역에 대한 정책은 차츰 더 적극적이고 정교화되는 추세다. 일례로 2017년 스웨덴은 디지털 성범죄 피해·가해 경험과 친밀한 관계에서 성적 동의·폭력 등 성적 권리(sexuality rights)에 대한 포괄적인 문항을 포함하는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에 대한 국가 조사를 했다(The Public Health Agency of Sweden, 2019). 스웨덴은 1967년과 1996년에도 이와 유사한 조사를 했지만, 재생산 영역을 넘어 성적 권리와 행동에 대한 문항을 포함하는 국가 수준의 조사는 2017년이 처음이었다. 이는 스웨덴 정부가 2014년 채택한 국가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 전략의 성과이기도 하다(Mannheimer et al., 2016).

유럽 국가들은 국내 정책 외에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 영역의 국제원조사업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 개발원조위원회(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 Development Assistance Committee)의 원조기금통계에서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와 관련한(130코드) 원조를 살펴보면 유럽 국가들은 건강과 관련한 양자 개발원조의 상당한 비중을 성·재생산 건강 영역에 투자하고 있다. 전체 건강에 대한 원조 중 성·재생산 건강에 대한 기여 몫이 가장 높은 것은 네덜란드로, 건강과 관련한 공여금 중 85%를 이와 관련한 사업에 할당하고 있다. 이어서 미국이 71%, 덴마크와 스웨덴, 캐나다가 각각 60%, 51%, 45%를 할당해 성·재생산 건강이 보건의료 개발원조의 상당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이에 비해 한국은 전체 보건의료 개발원조 공여금 중 5%만을 여기에 할당하고 있다(그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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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양자 공적개발원조 기금과 건강 영역 기금 중 성·재생산 건강 영역 기금 분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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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Jaeger, K. & Johnson, Z. (2021). Generation Equality? Trends from a decade of donor funding for SRHR. Retrieved from https://donortracker.org/insights/generation-equality-trends-decade-donor-funding-srhr 2021. 8. 29.

3. 나가며: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를 보장하는 정책을 바라며

국제적으로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가 보편적 인권 규범으로 주류화됨에 따라 여러 국가에서 이를 보장하기 위한 정책이 확대되고 있다. 보편적 건강 보장을 제공하는 대부분 국가가 피임 서비스를 무상으로 제공한다. 상대적으로 국가의 건강 보장 수준이 낮은 미국은 오바마 케어 개혁을 통해 본인부담금 없는 피임 서비스를 모든 보험에서 포함하도록 강제했다. 이처럼 여성 건강을 위해 피임과 임신중지, 그리고 여타 성·재생산 건강 서비스가 건강 보장의 틀 내로 진입하는 것은 국제적 추세다.

2018년 한국 사회는 보편적 건강 보장 30주년을 자축했다. 그러나 ‘성·재생산 건강 보장없이 보편적 건강 보장 없다(No UHC(Universal Health Coverage) without SRHR)’라는 국제사회의 구호에 비추어 본다면 한국의 건강 보장은 성 소수자 건강 서비스는 물론 피임과 임신중지 같은 필수적인 여성 건강 서비스를 급여에 포함하지 않는다. 출산율 억제에서 출산율 증가로 방향을 전환하였을 뿐 여성 건강과 성적 권리에 대한 보장이 아닌 인구통제를 위한 건강정책을 지속해 왔던 한국에서 성·재생산 권리는 여전히 정치적 경합을 벌이고 있는 개념이다.

2021년 열린 평등의 세대 포럼에서 발표한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에 대한 행동강령에서 제시한 네 가지 전략에 비추어 보면 공백은 더욱 두드러진다. 2026년까지 모두에게 포괄적 성교육을 제공해야 한다는 목표가 무색하게 제4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은 논의 단계에서 포함되어 있던 ‘포괄적 성교육’의 개념과 취지가 삭제된 채 발표되었고, 한국의 건강보험은 성·재생산 건강을 보장의 영역으로 온전히 인식조차 하지 않는다(김새롬, 2021). 정부는 사람들의 재생산 선택을 선별적으로 지원하는 다양한 정책을 저출산 대책으로 제시하면서도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 보장을 위한 제도를 도입하는 데에는 미적지근하고, 빠르게 진화하는 디지털 성범죄의 양상을 따라잡을 수 있는 규제와 법을 도입할 수 있는 역량도 부족하다.

다만 명백한 것은 사람들이 정부에 기대하는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에 대한 책무가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시민들은 더는 성적 권리와 재생산 건강을 개인적으로 부담해야 할 사사로운 일로 여기지 않는다. 낙태죄를 폐지하고 안전한 임신중지를 보장해야 한다고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시민들의 요구, 그리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틀어 만연한 젠더 기반 폭력과 일상과 일터에서 성적 괴롭힘과 착취를 해결해야 한다는 요구에 반응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에 대한 한국 정부의 책임은 국내에 국한되지 않는다. 국제개발원조와 유엔, 세계보건기구 등 국제사회 논의에서 국제적 책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국가 중심적 인구정책을 넘어 여성들의 건강과 권리를 중심에 두는 사람 중심적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국가 중심의 인구통제와 재생산하는 몸을 도구화했다는 비판과 불신을 벗어나기 위해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라는 규범적·실무적 관점을 준수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다.

Notes

1)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를 보편적 인권의 한 축으로 제시한 베이징 선언과 행동강령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베이징 세계여성대회는 유엔 여성이 설립되기 이전 개최된 네 번째 세계여성대회로, 한국에서도 600여명이 참석했다. 본디 베이징 세계여성대회 25주년과 유엔 여성 설립 10주년을 기념하여 2020년 개최할 계획이었으나 전 세계적 코로나19 유행으로 인해 1년 미뤄져 2021년 온라인 콘퍼런스로 개최되었다.

2)

제4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에서는 1994년 카이로 국제인구개발회의 및 베이징 여성대회에서 제시한 정의를 빌려 성·재생산권을 ‘인권으로 확립된 개념으로 성·재생산 전반에 질병·기능 저하, 장애가 없는 상태를 포함해 신체적·정신적·정서적·사회적으로 안녕(well-being)한 상태를 의미한다’고 규정한다.

3)

(원문) SDG 3.7. by 2030 ensure universal access to sexual and reproductive health care services, including for family planning, information and education, and the integration of reproductive health into national strategies and programs.

4)

보편적 건강 보장이 성·재생산 건강을 포함해야 한다는 이 성명에는 아르헨티나, 호주, 벨기에, 볼리비아, 칠레, 콜롬비아, 덴마크, 핀란드, 프랑스, 독일, 아이슬란드,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멕시코, 노르웨이, 뉴질랜드, 남아프리카공화국, 스웨덴, 스위스, 영국 등이 참여했으며, 한국은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았다. 성명 전문과 참여국은 다음 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www.government.nl/documents/diplomatic-statements/2019/09/23/joint-statement-on-srhr-in-uhc

References

1 

김새롬. (2021). 포괄적 성·재생산 건강보장을 위한 보건의료체계의 과제: 임신중지를 중심으로. 여성연구, 109(2), 5-36.

2 

하정옥. (2013). 재생산권 개념의 역사화ㆍ정치화를 위한 시론. 보건과 사회과학, 34, 183-210.

3 

Dhatt R., Varanka C., Williams L. C. (2021). For health security and equity, time to end the Global Gag Rule once and for all. https://www.justsecurity.org/77423/for-health-security-and-equity-time-to-end-the-global-gag-rule-once-and-for-all/에서 2021. 8. 29. 인출.

4 

European Parliament. (2021). EU countries should ensure universal access to sexual and reproductive health. https://www.europarl.europa.eu/news/en/press-room/20210510IPR03806/eu-countries-should-ensure-universal-access-to-sexual-and-reproductive-health에서 2021. 8. 29. 인출.

5 

Freedman L. P., Issacs S. L. (1993). Human rights and reproductive choice. Studies in Family Planning, 24(1), 18-30.

6 

Generation Equality Forum. (2021). Action coalitions: Global acceleration plan. https://forum.generationequality.org/sites/default/files/2021-06/UNW%20-%20GAP%20Report%20-%20EN.pdf에서 2021. 8. 29. 인출. Paris: UN Women.

7 

Government of the Netherlands. (2019). Joint Statement on SRHR in UHC. https://www.government.nl/documents/diplomatic-statements/2019/09/23/joint-statement-on-srhr-in-uhc에서 2021. 8. 29. 인출.

8 

Jaeger K., Johnson Z. (2021). Generation equality? Trends from a decade of donor funding for SRHR. https://donortracker.org/insights/generation-equality-trends-decade-donor-funding-srhr에서 2021. 8. 29. 인출.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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